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완 민주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|| [youtube(XFOKdN67LLM)] || [[1894년]] 발발한 [[청일전쟁]]에서 [[청나라]]가 [[일본 제국]]에게 패하고 [[시모노세키 조약]]을 체결했다.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일본 제국에게 [[타이완섬]], [[펑후현|펑후 제도]]와 [[요동]]을 할양했다. 이 소식을 들은 대만인들은 조약에 반대하며 당경숭(唐景崧)과 구봉갑(丘逢甲) 등을 중심으로 [[1895년]] [[5월 25일]] 대만 민주국을 수립했고, 연호를 영청(永淸)으로 정했다. 당시 청나라의 총병(總兵)이였던 [[유영복]](劉永福, 류융푸)은 자신의 무장 조직 [[흑기군]](黑旗軍)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에 가담하였다. 이에 [[일본 제국]] 측에서는 가바야마 스케노리(樺山資紀)에게 대만 총독 자리를 위임한 후 타이완 민주국 정벌을 맡겼다. 전쟁은 5개월 동안 계속됐으며 결국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일본이 승리하였고 타이완섬은 일본 제국의 관할이 되었다. 국가 원수였던 구봉갑, 당경숭, 유영복 등은 [[샤먼시|샤먼]]으로 도망쳤고 7년 동안 대만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. 일본군은 1895년 10월 하순까지 계속된 대만 점령 과정에서 사망자 5천, 부상자 2만 7천명의 피해를 입었다.[* 대부분의 피해는 교전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대만에 유행하던 [[말라리아]]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. 타이완 민주국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겨우 164명.] 나중에 [[중화민국 국민정부]] 주석을 지내는 [[린썬]]도 타이베이 전보국 직원이었다가 대일 항전에 참가했었다. 대만 민주국 주도 세력은 일제가 [[랴오둥 반도]]를 토해낸 [[삼국간섭]]을 보고 열강들이 자신을 승인해줄 거라 생각했지만, 열강들은 물론 대만의 영유권을 할양한 청나라도 대만의 항전을 지원하지 않았다. 일본의 압도적인 병력이 상륙하자 주민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일본의 점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. 게다가 이전부터 [[스페인]], [[네덜란드]] 등의 서방 식민제국과 [[명나라]] 유민 출신의 [[정성공]] 일파, 중국 본토의 청나라 등 외래 세력의 지배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대만인들은 이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였고, 독자적인 정체성, 민족 의식도 희박한 편이었다. 일본의 점령이 완료되고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다 대륙으로 떠나버린 후[* 약 20~30만 명 정도가 일본의 대만 점령 과정에서 대륙으로 도망쳤고, 일본이 1897년까지 2년 안에 대만인의 대륙으로의 이주를 허용한 이후 6,400여 명이 추가로 대만을 떠났다. 당시 대만 인구의 약 10% 정도. 이들은 반산(半山)이라 불리며 나중에 대만이 중국에 반환된 후 대만으로 귀환해 국민당 정부의 대만 통치에 협력했다.], 남은 대만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편을 택했고, 일본도 굳이 강압적인 방식을 적용할 필요 없이 온건한 식민 통치를 펼쳤다. 이후 일본의 대만 식민 통치는 [[제2차 세계 대전]]으로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50년 동안 계속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